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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기자 칼럼] 적극 행정과 적폐 사이

박기호 2019/04/17 17:54

청와대가 공직사회에 ‘적극행정은 면책, 소극행정은 문책’이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은 지난 12일이다. 핵심 규제 완화책인 ‘규제 샌드박스’ 제도와 관련해 관련 부처에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하면서다. 늘공(늘 공무원의 준말, 직업 공무원)과 한때 늘공이었던 인사들에게 앞으로 변화가 있을지 물었다. “쉽지 않을 것”이라거나 “요즘 공직사회 분위기와 거리감이 있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정책이 일관성을 유지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정권의 성향과 의지, 지향하는 바에 따라 정책 흐름은 변하게 마련이다. 보수에서 진보로, 진보에서 보수로 정권이 바뀌면 물길마저 바뀌기도 한다. 요즘 많이 거론되는 소득주도성장, 노동존중, 사법개혁, 원전 정책 등이 그렇다. 이 정부의 핵심 키워드이자 이전 정부와 굵은 선이 그어지는 것들이다. 과거의 정책 흐름은 적폐로 분류돼 단죄됐거나 진행 중이다.

적폐 청산의 학습효과

적극행정이 공직자의 적극성만을 필요충분조건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 정부에서 규제개혁을 담당했던 한 공직자는 “규제 한 건을 고치려면 정책 의지, 법제 정비, 국민 정서까지 어우러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 전반의 컨센서스가 없으면 적극행정은 색깔이 덧칠되거나 감사 표적이 되는 리스크를 안아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적극행정이 규제개혁의 출발인 것은 분명하지만 적극행정 기반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극행정에 나설 늘공이 얼마나 있을까 의문이다. 요즘 적폐로 거론되는 대부분이 이전 정권의 정책이라는 점은 공직사회에 강력한 학습효과를 남겼다. 특정 성향 정권의 무한 집권이 불가능한 만큼 적극행정은 언제든 적폐로 뒤바뀔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행정고시를 거쳐 중앙부처 정무직을 지낸 한 인사는 “적극 행정에 부여되는 면책은 유한하고, 적폐로 변질할 가능성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탓에 차라리 소극행정을 하고 문책당하겠다는 분위기가 후배들 사이에 팽배하다”고 우려했다.

부처의 정책 기능 되살려야

적극행정을 해치는 또 다른 요인은 공직사회의 침체된 사기다. 과거사 청산이나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의 민간위원회로부터 혹독하게 경을 친 늘공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부처 업무 자문에 응하거나 프로젝트를 맡아왔던 민간인들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운명이 휘둘리는 것을 하릴없이 지켜보며 나랏일 하는 자부심은 땅에 떨어졌다. 당근(면책)이나 채찍(문책)과는 비교도 힘든 사법처리도 지켜봤다. 적폐 조직의 하나로 분류되는 모 부처의 고위공무원은 “장차관 같은 정무직이라면 모를까 국과장이나 사무관에게 적극성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만약 움직인다면 방패막이 용도의 녹취나 비밀 메모가 이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모든 일은 청와대로 통하는 행정 행태도 적극행정의 걸림돌로 인식되고 있다. 컨트롤타워가 워낙 높고 탄탄한 까닭에 부처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작금의 공직사회에서 ‘적극행정=잠재적 사후 적폐’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모양새다. 적극행정을 규제개혁의 출발점과 지렛대로 삼으려면 면책을 면책으로 믿도록 해야 한다. 늘공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정책의 주체로서 위상을 세워주는 것이 선결 과제다. 현재는 물론 미래의 공직사회에 적폐라는 망령이 여전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해소해야 한다. 그래야 적극행정이라는 외침도 큰 울림을 갖게 된다.

khpar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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